작성일 : 13-06-10 22:34
많이 솔직한 후기.
 글쓴이 : 영아
조회 : 8,788  
세상 사는 일 다 아는거 같다가도 하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지 생각은 많은데 행동까지 옮겨지는 길은 멀다.
 
과거는 추억인지 상처인지, 집착인지 거름인지 모르겠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믿고 싶다.
 
서울에서 템플스테이 신청하기 직전 써둔 일기내용이었습니다.
 
선암사에 오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갑자기 생긴 휴가에, 언젠간 템플스테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고자
 
이 사찰, 저 사찰들을 알아봐도 이미 정원이 꽉 차 있었고
 
마침, 자리가 남았다는 사찰이 선암사였기에. 더 정보도 없이 단지 그 이유로만 택했습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찰일 줄은 꿈에도 상상도 못했습니다. 
 
기차표도 남아있질 않아 네시간 반이 걸리는 무궁화호표를 간신히 구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마음은 이미 저 글처럼 어지러운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구름이 걷히자 간사하게도,
 
혼자 사는 집 안 방안에 멍하니 앉아있으나, 산 속 절간에 앉아있으나
 
공간만 다르지 뭐 특별한거 있겠는가?
 
괜시리 먼 길 떠났나? 것두 혼자서.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사실도
 
어지러운 마음이 걷히고 간사한 생각이 드는 데 한 몫 했겠지만
 
모든 일은 다 그냥 그대로 두면 지나가는 것이거늘.
 
그 괴로운 마음을 몇 날 며칠이고 지속시키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놓지 못해서이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라 그런 것임을.
 
첫 날 저녁 스님의 차담 말씀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현재를 살라.
 
어찌 보면 어디서나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까지만 듣고도 저는 서울에서 품고 간 의문에 벌써 두 개나 답을 내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 알 필요도 없다. 현재에만 충실하면 된다.
 
과거는 그저 지나간 그 시간 그 곳에 있는 것일 뿐. 추억도 상처도 집착도 아무것도 아니다.
 
제 마음이 어지러우면 그 누가 좋은 조언과 위로를 해줘도
 
소리가 귀로만 들어오지, 마음으로는 들어오질 않아요.
 
부모님께서 공부가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해도 학창시절엔 그 누가 그 말을 믿습니까?
 
자기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니.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지.
 
매일 같은 길을 지나 매일 같은 회사에 들어가 매일 같은 일을 하고
 
가는 곳만 가고 내가 편한 일만 하며 내가 좋은 사람들만 만나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 속은 좁아져만 갑니다.
 
이 곳에 혼자 와서, 다양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똑같은 사람들하고만 만날때는 보지 못한 내 모습을 마주봅니다.
 
편백나무 숲에 등을 대고 누워 눈을 감으니
 
문득 실컷 울고 싶어지며 눈물이 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해야지 착하게 대해야지 하는 다짐은,
 
그 마음을 악용하는 너무 똑똑해진 세상에 상처받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내 생각도 넓히고 즐겁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은,
 
뜻하지 않은 배신과 험담으로 상처받습니다.
 
그렇게 채이고 치이다 생채기나고 심통만 남은  마음은
 
어느새 도끼눈을 하고선 사람과 어울리길 꺼려하고 있었다는걸,
 
서로 얽혀 어우러지며 자라는 나뭇가지들을 보고 깨닫자 눈물을 막을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경계하고 믿지 못하고 순수한 호의조차 의심하고.
 
사람을 멀리하고 혼자서 혼자서 사방에 벽을 치고 웅크려 앉아.
 
왜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잊고 살고있나.
 
어쩌다 이리 형편없는 모습이 되버렸을까.
 
그 숲에서 실컷 울고 나면
 
지난일은 지난일로. 그 당시 그곳에 가만히 내려두고.
 
초라하게 변했을지라도 내 모습을 용서하고 인정하고
 
생채기를 닦아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숨통이 조금 트이자 조금 겁은 났어도
 
낯선 분들과도 손을 맞잡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참 못났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직은 아물지 못했나봐요.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확실히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습니다.
 
실천하는 열정이 부족한 것은 몸이 게을러서라고.
 
그러고보니 회사에선 종일 책상에만 앉아있고
 
집에서는 엉뚱한 서구식 문화로 침대위에서 모든 생활을 합니다.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건 순전히 제가 게을러서였어요.
 
편백나무의 맑은 향을 맡으며 또 의문 하나를 해결합니다.
 
서울에 가면 침대부터 제 자리로 돌려보내놓아야겠어요.
 
산책이 끝나고 심검당 뒷뜰에 흐르는 물을 발에 끼얹으며 앉아있었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뜨자, 물에는 파문이 일었지만
 
그 석조 안에 있는 물은 전과 같은 물일 뿐 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장난을 멈추고 조용히 앉아있는데
 
맞은편 숲에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일제히 사르륵 소리를 내며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그 나무는 계속 그 곳에 변함없이 서 있는 나무.
 
그것이 바람에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 변하는 것은 사람 마음이지 본질은 변하지 않는것이었어요.
 
그렇게 마지막 남은 네 번째 의문마저 해결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저는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교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을 더 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 평화. 그것인데.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세력을 키우고 다툼이 일고 전쟁이 나고...
 
그런데 스님께선 말머리마다 부처님보다 예수님을 앞세우시고, 찬송가 한 곡절에다가.
 
뒷산 내려오는 길엔 성탄절 봉축 현수막도 걸어놓으셨었지요.
 
그리고 염주를 만드는 시간까지 되자 
 
종교라는 것도 괜찮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님 말씀을 듣고, 지나간 일인데 아직 놓지 못한 것들, 상처들, 미움, 원망, 화,
 
보기 싫어 미운 사람, 보고싶어 힘든 사람, 하나 하나를 한 구슬마다 담아 끼웠습니다.
 
그렇게 만든 염주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참 가벼워졌습니다.
 
집에 와서 티비를 켜는 대신 티비에 대추나무 염주를 걸어놓고
 
바라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집니다.
 
제 잡념과 번뇌는 이제 제 안에 없고 저기에 있습니다.
 
그 가벼운 마음이 너무나 편안합니다.
 
잡념을 없어지게 하는 108배도 두려워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번은 해봐야겠어요.
 
등산은 사장님 지팡이에 떼밀려 올라간 작년 회사 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다시 내가 등산을 하느니 발목을 부러뜨리고 말겠다 다짐을 했는데
 
스님 말씀대로 '왼발, 오른발'만 생각하고 또 '들고 내려놓고' 그것만 생각하며
 
느리더라도 쉬지않고 꾸준히 오르니 할 만 했어요.
 
아니, 할 만 한게 아니라 사실 완전 좋았습니다. 산 모르는 제가 봐도 조계산은 정말 산이 좋더라고요.
 
비로암에 오르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뻔 했습니다.
 
그리고 기차표때문에 쫓기듯 하산한 제 하행길을 도와주신
 
때죽나무 하얀 꽃처럼 환한 두 분 비구니스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물론 손수 차를 몰아주신 스님께도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승선교를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걸어서 음미하며 내려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올때의 마음과 갈 때의 마음을 비교해보고 싶었는데
 
너무 쫓기듯 내려와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쫓기듯 내려오지 않았다면, 거기에 영영 주저앉을뻔 했습니다. ^^
 
느끼고 온 것이 너무 많아, 글이 너무 솔직하게 장황해졌습니다.
 
(그날 밤 쓴 편지는 이것보다 더 장황해서 차마 드리기가 부끄러웠어요..)
 
그러나 사실은 한 가지 가장 마음에 콕 박힌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템플스테이 첫 일정으로 "나는 차밭이 좋더라" 하며 저희를 차 밭으로 먼저 이끄셨지요.
 
생각보다 아담한 차밭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부끄럽지만 이랬어요...
 
'차 나무 키가 이렇게 작은데! 심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차밭 가지고 괜히 있는 척 하시나?'
 
제가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도 더 되시는 차나무께 큰 실수를 했지요.
 
사람도 깊이가 있는 사람이 맛도 향도 훌륭하다는 말씀.
 
머리를 뎅~ 하고 울렸습니다.
 
사람에 치이며 내 모습을 점점 잃어가는 것 같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막막했는데.
 
아. 저도 뿌리가 깊은 차나무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않겠습니다.
 
다시 네시간 반을 걸려 서울에 도착하니
 
올 들어 최고 더위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들립니다.
 
순천은 남쪽 끝이고 서울은 북쪽인데도 서울이 훨씬 더 덥네요.
 
결국 창고에 넣어뒀던 선풍기를 꺼내왔습니다.
 
선풍기 앞쪽에 편백나무 씨앗을 끼워넣고 그 바람을 맞으며
 
조계산 숲 바람소리와 선암사 새벽 공기를 생각합니다.
 
들숨에 사랑과 감사를 마시고 날숨에 미움과 원망을 뱉어요.
 
많이 비우고 왔다지만,
 
어느날 또 머릿속에 폭풍이 몰아치고 마음에 물결이 일겠죠.
 
그 때마다 겨울 곳간에 쌓인 식량마냥 든든한, 부적과도 같은 반야심경과
 
제 번뇌들이 담긴, 모난 데 없이 동글동글한 염주를 보면서
 
그 흔들림도 잠시일 뿐 곧  <이미 지나간 시간>이 된다는걸,
 
본질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
 
다시 마음에 평화가 오고
 
마음이 평화로우면 몸도 건강하고 
 
저 하나가 그러하면 세계평화에도 일조할 수 있겠죠?
 
그리고 주로 좋지 못한 소식들을 다루고, 빨리빨리! 하는 고함과 고성이 오가는 저의 회사..생활도
 
무난히 무던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현재를 허비하진 않겠습니다.
 
큰 방에 걸린 시계를 보시면 가끔은 '그런 아이도 다녀갔드랬지...' 하고 저를 떠올려 주시려나요? ^^
 
감사합니다. 스님.
 

김정희 13-06-11 16:13
 
이렇게 만나니 더 반갑네요~~ 세계평화 샘~~ 맞지요? 얘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글을 읽는 걸로 대신할게요~~~
김영준 13-06-15 15:34
 
세계평화님..?! 느낌이 그렇네요.
조계산 오를때, 힘들어 하셨는데, 잘 도착하셨다는 소식들어 좋네요..

손을 잡았던 사람이기도 하고, 님의 유연함이 부러웠던 사람이기도 하고, 오렌지로 등을 밀어 드렸던 사람..안마도 해드렸고, 받았고... 같이 곡차도 드시고..
참 많은 것을 했네요..

저녁에 옆방이 시끄럽다고 저에게 요청하셨는데....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했지요.
그 덕인가요? 성불하셨네요..축하드립니다.

등명스님께서 사진을 올려 두셔서, 잘 이해가 되네요..
글이 고마워서 댓글을 씁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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